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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자료  (1) 2014.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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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MY 스크랩/[자료]_마음다스리기/명상

[명상]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 참교육의 의미

여러분은 혹시 교육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자문해 본 적이있는지 궁금하군요. 우리는 왜 학교에 가며, 왜 여러 가지 과목을 배우고, 왜 시험을 치르고,왜 저마다 나은 점수를 얻으려고 경쟁할까요? 이른바 교육이라고 하는 이 말은 무슨 뜻이며, 무엇을 교육한다는 것일까요? 이것은 정말 중요한 물음입니다. 학생들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학부모, 선생님들, 그리고 이 땅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물음입니다. 우리는 왜 교육받기 위해 경쟁에 뛰어들까요? 그저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젊은 시절에 인생의 전 과정에 대한 이해를 마련하는 데에 교육의 기능이 있는 것일까요? 일자리를 얻고, 생활비를 번다는 건 필요한 일입니다. 


인생은 참으로 넓고도 깊은 것입니다. 인생이란 엄청난 수수께끼, 인생이란, 우리가 인간으로 기능하는 엄청나게 넓은 땅입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한 준비나 하다 보면 우리는 인생의 전체적인 의미를 놓치게 되고 맙니다. 인생을 이해한다는 것은, 시험을 준비한다거나, 수학, 물리학 등 여러분이 뛰어들고자 하는 분야에서 대가가 되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든 학생이든, 우리가 왜 교육하며,왜 교육받고 있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다? 


자, 한 번 물어봅시다. 삶이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삶이라는 것은 사실 굉장히 놀라운 것이 아닐까요? 새, 꽃, 푸르른 나무, 하늘, 별, 강, 강에 사는 물고기 이 모든 것이 삶입니다. 삶이란 구차스러운 것이면서도 풍요로운 것입니다. 삶이란 무리, 종족, 국가간의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삶이란 명상입니다. 삶이란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며, 우리 마음속에 은밀히 숨어있는 미묘한 것들, 선망, 야망, 열정, 공포, 성취와 근심 같은 것들입니다. 삶은 이 모든 것이며,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겨우 이 모든 것의 조그만 귀퉁이 하나만을 이해할 준비나 하는 게 고작입니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시험에 합격하고 일자리를 얻어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그리고는 나날이 기계를 닮아갑니다. 우리는 그러면서도 삶을 두려워하고 근심하고, 삶에 대해 놀랍니다. 


자, 그렇다면 교육의 기능은 우리를 도와 인생의 전 과정을 이해하게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직업, 우리 능력이 허락하는 최상의 일자리를 얻기 위한 준비나 시키는 데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자라 성인이 되면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어른이 되면 무엇을 할 것이냐고 자문해 본 적이 있는지요? 보나마나 결혼이나 하고,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채 깨닫기도 전에 어머니 아버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일에, 혹은 부엌에 싫증을 내게 되고, 점차 일터나 부엌에서 시름시름 시들어 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겨냥하던 삶이 겨우 그겁니까? 이런 물음을 자신에게 던져본 적이 있습니까? 마땅히 던져 봐야 할 물음이 아닐까요? 여러분이 부잣집 아들딸들이라면 진작에 보장된 훌륭한 일자리도 있을 테고, 여러분 아버지가 쓸만한 일자리를 만들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부잣집에 시집 장가갈 수 있을 테지요, 하지만 그런데 휩쓸리면 부패하고 맙니다. 여러분 인격이 뒤틀리고 맙니다. 아시겠지요? 


분명하게 말해 둡니다. 삶이 참으로 미묘하고 엄청나게 아름답고, 슬프고, 기쁜 것이라는, 말하자면 삶의 넓이를 이해시키는데 여러분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교육은 무의미합니다. 

여러분은 학위를 얻을지도 모릅니다. 이름 뒤로 수두룩하게 직함을 거느릴 수도 있고, 아주 좋은 일자리에 안착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는 뭡니까? 그러고 나서 여러분 마음이 흐리멍덩해지고 마음 쓰임새에 진력이 나고, 하는 짓이 어리석게 여겨진다면, 그래서 뭘합니까? 그러니까 젊을 때 인생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애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육의 참기능이란, 이 모든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낼 수 있도록 여러분 안에 있는 지성의 잠을 깨우는 것이 아닐는지요? 지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성이란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생각하는 능력입니다. 지성을 통해 자유로이 생각하면 여러분도 무엇이 의미있는 것인지, 무엇이 참된 것인지 스스로 찾아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고 있으면 절대로 지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 정신적인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야심이라는 것은 그 겨누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근심과 두려움의 씨앗이 됩니다. 따라서 야심은 우리들의 마음을 맑고, 단순하고, 곧고, 따라서 지성적이게 해 주는 데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아시겠지만 젊은 시절에 두려움을 모르는 환경에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 겁이 많아집니다. 우리는 사는 것은 겁내고, 일자리를 잃을까 겁내고, 우리들 관습을 겁내고, 이웃이 어떤 사람들일까 하고 겁내고, 남편이나 아내가 무슨 소리를 할까 해서 겁내고, 죽는 것을 겁냅니다. 우리들 대부분의 내부에는 어떤 형태로든 공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모두가 젊은 시절을, 두려워 할 것이 없는, 말하자면 분위기가 자유로운-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환경에서 지내는 것이야 가능하겠지요. 


인생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인생이란, 그 인생을 경영하면서 우리가 만들어 낸 추한 것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모든 것에 대해-조직화한 종교에 대해, 관습에 대해, 지금의 부패한 사회에 대해-모반을 시도한다면 인생의 넉넉함, 그 깊이, 그 참으로 예사롭지 않은 아름다움의 정수를 맛볼 수가 있고, 인간으로서 스스로 무엇이 참된 것인가를 알아 낼 수도 있습니다.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교육이란 이런 것이 아닐는지요. 사회가 요구하는 것,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안전하고도 손쉬운 생존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삶일 수는 없습니다. 무슨 까닭에서일까요. 여기에는 공포와 부패와 죽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산다는 것은 스스로 무엇이 참된 것인가를 모색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모색은 자유가 있는 곳에서만, 여러분의 내부에 끊임없는 내적 모반이 있는 곳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이러한 삶을 고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물음을 던지라고 하는 사람, 신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보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이 모반을 시도하면, 엉터리인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위험한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이나 사회는 여러분이 안전하게 살 것을 바랍니다. 여러분도 안전하게 살고 싶어하고요. 안전하게 산다는 것은 모방하는 삶을 말합니다. 따라서 공포안에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육의 기능이란, 우리들 개개인을 자유롭게,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아닐까요? 두려움이 없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는 교육자인 선생님 몫은 물론이고 여러분 자신의 몫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이 필요합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두려움이 없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게 굉장한 일인지 아시겠지요. 우리는 이런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왜냐? 우리가 보기에, 이 세상은 끝없는 전쟁의 와중에 휘말려 있습니다. 전쟁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늘 권력을 장악하려는 정치가들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법률가, 경찰, 군인, 그리고 저 나름의 지위에 오르고 싶어하고, 그 지위에 오르기 위해 싸움질을 일삼는 야심 만만한 사람들 세상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른바 성자들도 있고,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린 구루(스승)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역시 이승에서건 내세에서건 권력과 지위를 탐합니다.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혼란스러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공산주의자는 자본주의자와 드잡이하고, 사회주의자는 이 양자를 업어치기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안전한 자리, 권력 혹은 안정된 생활이 있는 지위를 얻으려고 누군가를 상대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서로 반목하는 신앙으로, 카스트(인도의 세습적 제도)와 귀천의 구별짓기로, 분리주의적인 국수주의자들로, 갖가지 우매한 짓거리와 잔혹한 형태로 누더기가 되어버린 세상입니다. 적응해야 한다고, 여러분이 늘 이 한심한 사회의 틀에 적응해야 한다고 배우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들이 바라고, 여러분 역시 여기에 적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이 다 썩어문드러진 사회 질서의 무늬에 여러분을 길들게 하는 것이 교육의 할 일일까요, 아니면 여러분에게 자유-자라서 장차 전혀 다른 사회, 새로운 세상을 지어낼 수 있게 하는 온전한 자유-를 주는 것이 교육의 할 일일까요? 우리는 이 자유를 얻고 싶어합니다. 미래에 얻게 될 것을 바라는 게 아니고 지금 얻고 싶어합니다. 얻지 못하면우리 모두 파멸하고 맙니다. 참된 세상을 살고 참된 것을 스스로 찾아내려면, 지성적인 인간이 되려면, 세상을 그저 익히는 것이 아니라 맞서고 이해하려면, 지금 바로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항상 내적으로 깊이 있는 심리적 모반을 도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항상 심리적 모반을 도모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참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사람은, 이성의 가르침에 순응하는 사람은 전통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항상 모반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진리를 찾아내고 신이나 사람을 만나는 일은, 항상 묻고 항상 관찰하고 항상 배울 때만 가능합니다. 두려워하면 물을 수 없고, 관찰할 수 없으며, 배울 수 없으며,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육의 기능은 마땅히 외적으로는 물론 내적으로도 인간의 생각, 인간의 관계와 인간의 사상을 파괴하는 이 두려움을 뿌리뽑는 것이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반을 꾀한다면, 이 세상에 혼란이 올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지요? 


크리슈나무르티: 먼저 질문 자체를 음미해 봅시다. 무슨 까닭에서요? 질문 자체에 대한 이해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저 대답을 기다리지는 말아주세요. 질문이 이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반을 꾀한다면, 세상에 혼란이 오지 않겠느냐고요. 그러니까 지금의 사회는 완벽한 질서를 구가하고 있는데 만일에 모든 사람들이 이 질서에 모반을 꾀한다면 혼란이 오지 않겠는냐는 거지요? '지금은' 혼란이 와 있지 않은가요? 부패한 것이 없어서 모든 것이 아름답기만 한가요?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여유있게, 넉넉하게 살고 있습니까? 사람과 사람이 반목하고 있지 않습니까? 야망도 없고, 아귀다툼 같은 경쟁도 없습니까? 아닙니다. 이 세상은 이미 혼란 상태에 있습니다. 먼저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 사회가 질서 정연한 사회라고 인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언어로 최면하지 마십시오. 이곳 유럽이든, 미국이든, 러시아든, 세상은 이미 부패과정에 있습니다. 이 부패 과정이 여러분에게 보인다면 여러분은 이미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이 급박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도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중요하겠지요? 만일에 여러분이 한두교도나, 불교도, 기독교도나 공산주의자로서 대응한다면 그 대응책에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대응책이 못되는 것이죠. 여러분에게 두려움이 없어야, 여기에 충분히 그리고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힌두교도로서, 공산주의자로서, 혹은 자본주의자로서 생각하지 말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생각해야 여기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해, 사회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탐욕스러운 소유욕에 끊임없이 저항할 수 없으면 이 문제를 풀어낼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욕심이 없어야, 여러분이 탐욕스럽지 않아야, 자신의 영달에 매달리지 않아야, 비로소 이 도전에 대응하여 새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저항하고, 배우고, 사랑하는 것은, 각기 독립된 과정입니까? 동시에 진행되어야 하는 과정입니까? 


크리슈나무르티: 물론, 각기 독립된 과정이 아닙니다. 단일한 과정인 것이지요. 아시겠지만,질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질문은 이론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지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언어적이고 지적일 뿐입니다. 따라서 알맹이가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 실제로 끊임없이 저항하고, 배우는 일과 사랑하는 일의 의미를 알아내려고 애쓰는 사람-이런 사람은 단일한 과정이 어떻고, 세가지 과정이 어떻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의 씀씀이에 아주 영리합니다. 그래서 설명을 요구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합니다.배운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정말 배우고 있다면 이는 온 삶을 통해서 배우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여러분에게 가르침을 베푸는 스승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이때면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가르침을 베풉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에서 배웁니다. 따라서 지도자도 없고, 철학자도 없고, 구루도 따로 없습니다. 삶 자체가 스승입니다. 이때 여러분은 끊임없는 배우는 경지에 들게 됩니다. 


사회가 소유욕과 야심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는 말씀이 사실인지요. 야심이 없으면 우리는 부패하지 않게 되는지요? 


크리슈나무르티: 정말 중요한 질문이군요, 따라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주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디 한 번 따져 봅시다. 교실에서 여러분이 창 밖을 내다보거나 다른 급우의 머리 꽁지를 당기고 있다고 합시다.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주의가 산만하니까 주의를 

기울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여러분은 하고 있는 공부에 흥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주의를 기울일 것을 강요합니다. 이것은 주의가 아닙니다. 주의라는 것은, 어떤 일에 전적으로 흥미를 기울이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때만이 여러분은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을 기꺼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니까요. 이럴 때, 여러분의 온 마음, 여러분의 전 존재가 거기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 이 질문-야심이 없으면 부패하지 않게 되느냐는-이 아주 중요한 질문으로 보이면, 여러분은 여기에 흥미를 가지고, 이 문제의 진실을 찾아내려고 할 것입니다. 


자,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야심 만만한 사람은 저 자신을 파괴하고 있지 않는지요? 야심이 옳은지 그른지 따져보기에 앞서 이것부터 먼저 검토해 보기로 합시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세요. 그리고 야심가들을 한 번 찬찬히 뜯어보세요. 여러분이 야심 만만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 자신을 생각하고 있을 테지요? 여러분은 잔인합니다. 여러분은 야심을 성취시키고 싶어서, 위대한 인물이 되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을 옆으로 밀어붙입니다. 여러분은 이로써 사회에다 성공하는 자와 뒤쳐지는 자 간의 갈등을 일으킵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좇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늘 싸움이 일어납니다. 과연 이 싸움이, 창조적인 삶에 보탬이 되는 생산적인 행위일까요? 이해가 갑니까? 내 설명이 너무 어려운가요? 일 자체가 좋아 기꺼이 그 일을 할 때 여러분에게 야심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전 존재를 기울여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합시다. 어떤 위치에 도달하기 위해서거나, 이득을 얻기 위해서거나, 보다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좋아서 하고 있다고 합시다. 이럴 때에 야심같은 건 없겠지요? 이럴 때엔 경쟁 같은 것도 없습니다. 일등 자리를 두고 누구와 다투는 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육이란 마땅히 여러분을 도와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여러분은 처음부터 인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참으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일,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는 일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여러분의 여생은 참 고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면 여러분의 마음은 오직 권태와 부패와 죽음뿐인 일상적인 일에 갇히고 맙니다. 여러분이 젊은 시절에,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일이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야말로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러하듯이 인도에서도 교육은 정부가 관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실험이 실시될 가능성이 있는지요? 


크리슈나무르티: 정부의 도움이 없다면, 이러한 종류의 학교가 있을 수 있을까요? 이분이 하신 

질문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이분은, 온 세계의 모든 일에 대한 정부, 정치가,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나 정신을 특정한 틀 안에 가두려 하고, 우리를 특정한 방향으로 생각하게 만들려 하는 

권위주의자들의 통제가 강화되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러시아나 다른 나라나, 정부가 교육을 관장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분은, 내가 말하고 있는 학교가 정부의 지원 없이도 가능할 것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자, '선생님'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아시다시피, 선생님은 어떤 일이 중요하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면, 정부나 사회의 법률을 무시하고 전력을 기울일 테지요. 그리고 이로써 성공을 거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어떤 일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질문이 나온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우리 모두가 내적, 심리적, 정신적으로 완벽하게 저항할 경우 새로운 세계의 탄생이 가능할 것이라고 확신한다면, 우리는 두려움 같은 부정적인 개념이 새어들어올 수 없는 학교를 만드는 데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몸을 바칠 것입니다. 선생님,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적인 것은, 무엇이 참된 것인가를 알고 기꺼이 그 진리에 따라 살 수 있는 소수에 의해 창조됩니다. 그러나 무엇이 참된 것인가를 알아내는 데는 관습으로부터의 진정한 자유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하는 것이지요.



[2] MY 스크랩/[자료]_마음다스리기/명상

[명상]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 죽음에 대하여

죽음은 신비로운 것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정화작용이기도 하다. 반복적인 패턴 속에서 지속되는 모든 것은 타락한다. 그 패턴은 나라나 기후 환경 등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패턴인 것이다. 어떤 하나의 패턴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지속성을 낳고 그 지속성은 인간을 타락 시키는 과정의 일부분이 된다. 지속성에 대한 종식이 있을 때, 새로운 어떤 것이 발생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고와 공포 ,사랑과 미움 등의 전체적인 운동을 이해했다면, 그 사람은 이 같은 사실을 즉각 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곧 그는 죽음이라는 존재의 중요성을 즉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그러한 질문을 받게 되면 사고에 의한 수많은 답변들을 준비한다. 사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죽음에 대한 모든 비극적인 설명들을 조사하고 싶지 않다.”모든 인간은 각자 자신의 조건이나 욕구, 희망등에 따라서 자기 나름대로의 해답을 가지고 있다. 그 해답이란 거의 예외 없이 사고에 의해서 결합된 지적인 것으로서 언어의 형태를 띤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아무런 해답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완전히 신비하고 새로운 어떤 것을 조사 해야만 죽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죽음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사람들은 유기적 조직체인 육체가 죽으면 두뇌 (이것은 살아가는 동안에 자기 탐닉이나 자기모순, 헛도니 노력, 끊임 없는 투쟁 등의 다양한 형태로 잘못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스스로 기계적인 형태를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또한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두뇌는 경험으로서의 기억과 지식으로서의 기억의 보관소이다. 두뇌의 세포들 속에 기억으로 저장된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사고가 일어난다. 한 유기체가 죽게 되면 두뇌역시 동작을 멈추게 되며, 그에 따라서 사고도 끝나게 된다. 

  

사고는 물질적인 과정이며, 결코 영속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두뇌의 세포들 속에 간직 된 기억에 근거를 둔 일종의 물질적인 과정이다. 그러므로 유기체가 죽으면 사고도 죽는다. 사고는 ‘나’의 전체 구조를 창조한다.그 ‘나’는 이것을 바라거나 저것을 바라지 않거나, 두려움을 느끼고, 근심하고, 낙담을 하고, 무언가를 바라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사고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도 어리석고 불행하게 살고 있다면, 투쟁하고 경험하고 획득한 인간에게 삶의 종말이 온다면, 그가 살아 온 인생이 무슨 가치와 의미가 잇겠는가?” 그러면 사고는 대답한다. “어나, 이것은 절대 끝이 아니야. 분명히 또 다른 세계가 있어.” 그러나 그 다른 세계도 여전히 사고의 움직임일 따름이다. 

  

사람들은 흔히 죽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묻는다. 이제 매우 다른 질문을 해보라. 죽음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죽음 이후가 아니다. 죽음 잎에 존재하는 것은 곧 한 사람의 인생이다. 무엇이 한 사람의 인생인가?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고 대학을 거쳐 직장을 얻고 가정을 이룬다. 남자는 근 50여년 간을 직장에 다니고 여자는 더 많은 재산을 늘리려고 분주히 다닌다. 그들은 자녀와 함께 고통과 근심도 가지고 있다. 그처럼 불행한 생활을 해나가면서도 그들은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고 싶어한다. 그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책들이 쓰여졌다. 그 모든 것들은 사고에 의해 산출되었으며 한결같이 ‘믿으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만일 사람이 그 모든 것을 실제로 완전히 던져 버린다면 그가 직면하는 것은 무엇이 될 것인가? 사고가 결합시킨 자아가 끝나게 되는 사실과 그는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모든 근심과 열망도 막을 내리게 된다. 사람이 지금 살고 있는 모습과 마찬가지로 활력과 에너지, 그리고 수고로운 인생사를 안고 살아갈 때, 과연 항상 죽음과 만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나는 왕성한 정력과 능력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런데 죽음이란 그러한 삶에 대한 종결을 뜻한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죽음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내가 너에게 집착하고 있는데 그 집착을 끝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뜻이다. 

  

어떤 탐욕스러운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죽을 때 탐욕을 가져갈 수 없다. 그러니 탐욕을 버려야 한다. 일주일 이나 열흘 이내가 아니다. 바로 지금 당장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활력과 에너지와 능력과 관찰로 가득찬 삶을 살아가며 지상의 아름다움과 함께 그 모든 것의 순간적인 종말, 곧 죽음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 이전의 삶은 죽음과 함께하는 삶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시간을 초월한 세계에 살고 있음을 뜻한다. 

  

사람은 자신이 얻는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없어지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삶에는 항상 극심한 운동이 존재하며 그에 따라 사람도 어느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는다. 이것은 개념이 아니다. 

  

사람이 죽음을 초대할 때, 이것은 자신이 붙들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종결이고 죽음이며 그러한 죽음은 매 분마다. 매 초마다 일어나는 것이다. 이때 그는 우리가 시간이라고 알고 있는 운동이 존재하지 않는 무시간적 차원의 상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제 그것을 보는 자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에 담긴 모든 내용물이 비워져서 시간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뜻한다. 곧 시간이 끝난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진짜 죽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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